
아이가 태어나면 어른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.
"눈은 엄마 닮았네, 코는 아빠 닮았어."
그리고 키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이런 말이 따라옵니다.
"아빠가 크니까 이 아이도 크겠다." 혹은 반대로 "엄마 쪽 외삼촌이 크니까 괜찮을 거야."
키 유전에 대해 우리가 가진 감각은 대충 이렇습니다. 키는 유전된다, 그리고 그 유전은 특정 부모 쪽에서 더 많이 온다.
여기에 더해 과학적으로 들리는 숫자까지 등장합니다.
"키의 80%는 유전이야."
이 말은 반쯤은 맞고, 반쯤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.
유전율 80%라는 수치가 실제로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.
🧬 키는 아빠 눈, 엄마 코처럼 하나씩 나눠받는 게 아닙니다

키는 혈액형처럼 하나의 유전자가 결정하는 형질이 아닙니다.
키는 고도로 다유전자적(polygenic)인 형질로, 수천 개의 유전자 변이가 각각 조금씩 기여해 한 사람의 키를 만들어냅니다.
2022년 Nature에 발표된 역대 최대 규모 키 유전체 연구에서는 540만 명의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.
그 결과 키와 유의미하게 연관된 독립적인 단일염기다형성(SNP,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)이 12,111개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으며, 이 변이들은 전체 인간 유전자의 약 21%에 해당하는 7,209개 구간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.
키 유전 관련 유전자로는 성장호르몬(GH) 수용체 유전자, 인슐린유사성장인자(IGF-1, Insulin-like Growth Factor 1) 유전자, 성장판 조절에 관여하는 SHOX 유전자 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.
그런데 이 유전자들은 특정 부모 쪽에 몰려 있지 않습니다.
대부분 상염색체(autosome)에 위치하며,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에서 절반씩 전달받습니다.
즉, "아빠 쪽 유전"이라는 통념은 애초에 생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.
📊 "키의 80%는 유전"이라는 말, 사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

"키의 80%는 유전이다"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이렇게 해석합니다.
'내 키 175cm 중 140cm는 유전자가 만든 것이고, 35cm만 환경의 결과다.'
이 해석은 틀렸습니다.
유전율(heritability)이란 한 집단 내에서 키의 개인 간 차이 중 유전자 차이로 설명되는 비율을 뜻하며, 60~80%로 추정됩니다. 중요한 건 이것이 집단의 통계라는 점입니다. 개인의 키가 80% 유전자로 결정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.
비유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.
같은 씨앗을 비옥한 땅과 척박한 땅에 각각 심었을 때 자라는 높이가 다른 경우, 그 차이는 100% 환경 탓입니다.
유전율은 0이 됩니다.
반면 비옥한 땅에만 서로 다른 씨앗 100개를 심었을 때 자라는 높이의 차이는 대부분 씨앗(유전자) 탓입니다.
유전율이 높아집니다.
유전율은 씨앗의 고유한 잠재력이 아니라, 그 집단 안에서 환경이 얼마나 균일하게 통제됐는가를 반영하는 수치입니다.
실제로 영양 상태가 좋은 사회일수록 유전의 비율이 높고, 영양이 부족한 환경일수록 환경의 비중이 커집니다.
현재 한국처럼 전반적인 영양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는 유전이 키 차이를 더 잘 설명하지만, 영양이 불균형한 집단에서는 환경 변수가 훨씬 크게 작용합니다.
80%라는 숫자는 고정된 진리가 아니라 집단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통계입니다.
🔬 80%라고 했는데 실제론 40%밖에 안 나옵니다

여기서 유전학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된 문제가 등장합니다.
쌍둥이 연구로 추정한 키 유전율은 80%인데, 실제 유전자 연구로 확인되는 수치는 왜 훨씬 낮을까요.
540만 명을 대상으로 한 Nature 연구에서도 12,111개의 SNP가 유럽계 조상 집단에서 키 변이의 약 40%를 설명하는 데 그쳤고, 비유럽계에서는 10~20%에 불과했습니다.
유전율 80%와 실제 설명력 40% 사이의 간극은 유전학에서 "사라진 유전율(missing heritability)" 문제로 불립니다.
이 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.
GWAS(전장유전체연관분석, Genome-Wide Association Study)로 잡히지 않는 희귀 변이들이 나머지 유전율을 설명할 가능성이 있고, 유전자들 간의 상호작용(epistasis)이나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(GxE, Gene-Environment interaction)처럼
단순 합산으로 계산되지 않는 복잡한 효과들도 관여합니다.
즉 키 유전율 80%는 "유전자가 이 정도 기여한다"는 확정값이 아니라 아직 과학이 완전히 풀지 못한 추정치에 가깝습니다.
⚠️ 이 숫자 하나가 체념과 과잉 기대를 동시에 만들어냅니다

이 숫자가 사회적으로 퍼지면서 두 가지 방향의 왜곡이 생깁니다.
하나는 체념입니다.
"부모가 작으니 나도 어쩔 수 없다"는 결론입니다.
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유전율은 집단 통계이고, 개인의 키에서 유전자가 담당하는 부분과 환경이 담당하는 부분을 그렇게 단순하게 분리할 수 없습니다.
유전이 성장의 잠재적 범위를 정하더라도, 아이의 유전적 성장 범위가 160~180cm라면 환경이 나쁘면 160cm 초반에 멈출 수 있고 환경이 좋으면 180cm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.
유전자는 설계도이고, 환경은 시공 품질입니다.
다른 하나는 과잉 해석입니다.
"80%가 유전이니 환경 관리를 해봤자 20%밖에 못 바꾼다"는 식의 계산입니다.
이 역시 유전율의 의미를 개인에게 잘못 적용한 결과입니다.
동일한 유전자 구성을 가진 일란성 쌍둥이도
식습관과 수면 패턴이 다르면 3~5cm의 키 차이가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.
20%가 아니라, 환경 요인의 개입 여지는 상당히 큽니다.
유전율 80%라는 수치는 "유전이 키를 얼마나 결정하는가"의 답이 아닙니다.
"이 집단에서, 이 환경 조건에서, 키 차이를 유전자 차이가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"의 통계적 기술입니다.
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숫자 하나가 잘못된 체념과 잘못된 기대를 동시에 만들어냅니다.
🌱 키 유전자가 설계도라면, 환경은 시공 품질입니다

유전이 설계도라면, 그 설계도를 최대한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성장호르몬(GH, Growth Hormone)입니다.
성장호르몬은 뇌하수체(pituitary gland)에서 분비되어 간에서 IGF-1 생성을 촉진하고,
이 IGF-1이 성장판(epiphyseal plate)의 연골세포 증식을 자극합니다.
성장판이 닫히기 전까지 이 축이 원활하게 작동해야 유전적 잠재력이 실현됩니다.
성장호르몬 분비는 수면 중 특히 활발합니다.
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 깊은 수면(서파수면, slow-wave sleep) 단계에서 하루 분비량의 상당 부분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. 이 시간에 잠들지 못하거나 수면의 질이 낮으면 성장호르몬 분비가 줄고, 유전적으로 가능했던 키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.
영양 측면에서는 단백질, 칼슘, 비타민 D, 아연이 성장판 연골세포의 원료이자 IGF-1 신호 전달을 지원하는 핵심 영양소입니다.
반대로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 코르티솔(cortisol)이 과다 분비되어 성장호르몬 분비를 직접 억제합니다.
아토피나 만성 소화불량처럼 몸의 에너지를 면역에 우선 배분하게 만드는 상태도 성장 속도를 늦춥니다.
결국 키 유전율이 높다는 것은 "환경이 중요하지 않다"는 뜻이 아닙니다.
환경이 충분히 균일하게 좋아졌을 때, 남은 차이를 유전자가 설명한다는 뜻입니다.
유전적 잠재력을 실현하려면 그 잠재력이 발현되는 환경부터 갖춰야 합니다.
참고 출처
꿈을 잊는 이유 & 렘수면 기억 메커니즘
- PMC — Sleep, dreams, and memory consolidation: The role of the stress hormone cortisol 🔗 https://pmc.ncbi.nlm.nih.gov/articles/PMC534695/
- Frontiers in Psychology (2015) — The role of REM sleep theta activity in emotional memory 🔗 https://www.frontiersin.org/journals/psychology/articles/10.3389/fpsyg.2015.01439/full
PTSD & 노르에피네프린 & 렘수면
- Journal of Neuroscience (2023) — Emotional Memory Processing during REM Sleep with Implications for PTSD 🔗 https://www.jneurosci.org/content/43/3/433
렘수면 & 감정 기억 공고화
- Nature Communications Biology (2025) — Both slow wave and rapid eye movement sleep contribute to emotional memory consolidation 🔗 https://www.nature.com/articles/s42003-025-07868-5
- Frontiers in Sleep (2023) — Modulation of emotional memory consolidation by dream affect 🔗 https://www.frontiersin.org/journals/sleep/articles/10.3389/frsle.2023.1239530/full
우울·불안 & 꿈 회상
- PMC — Impact of REM sleep on distortions of self-concept, mood and memory in depressed/anxious participants 🔗 https://pmc.ncbi.nlm.nih.gov/articles/PMC2847051/
키 유전율 & GWAS
- Nature (2022) — A saturated map of common genetic variants associated with human height 🔗 https://www.nature.com/articles/s41586-022-05275-y
- PMC — Insights and Implications of Genome-Wide Association Studies of Height 🔗 https://pmc.ncbi.nlm.nih.gov/articles/PMC7263788/
키 유전율 개념 & 환경 요인
- Taylor & Francis (2023) — Human height: a model common complex trait 🔗 https://www.tandfonline.com/doi/full/10.1080/03014460.2023.2215546
- BRIC — 친절한 유전상담 이야기: 유전율(Heritability) 🔗 https://www.ibric.org/myboard/read.php?Board=news&id=333382
'🔬 몸의 신비' 카테고리의 다른 글
| 👁️ 인간이 가진 다섯 가지 감각, 사실 그 이상의 감각이 있습니다. (0) | 2026.05.06 |
|---|---|
| 🦴 손가락 마디 꺾으면 관절염 생긴다는 말. 사실일까요? (0) | 2026.05.01 |
| 🍜😷감기 걸렸을 때 라면 먹으면 왜 콜록거릴까요,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(0) | 2026.04.19 |
| 겨울철, 밖에 있을 땐 괜찮다가 실내 들어오면 간지러운 이유 ?? (0) | 2026.04.06 |
| 밥만 먹으면 왜 이렇게 졸릴까요? 운동부족이 아닙니다. (0) | 2026.03.23 |